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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5. 3. 11. 10:00 - mano.

연극 <유리동물원> - 살기 위해 뿔을 꺾는 사람들



ⓒ 명동예술극장


연극 <유리동물원>
살기 위해 뿔을 꺾는 사람들


극: 테네시 윌리엄스

연출: 한태숙

출연: 김성녀, 이승주, 정운선,심완준

명동예술극장 2015.02.26~2015.03.10


※ 스포일러 주의! 아래 글에는 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!

 


당신과 나의 초상

연극 <유리동물원>은 톰(이승주)이 기억하는 과거의 자신과 가족, 어머니 아만다(김성녀), 누나 로라(정운선)의 이야기다.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이지만, 영어 이름같은 몇 가지 낯선 것들을 제외하고는 꼭 지금, 여기, 우리의 이야기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. 친숙한 모습에 웃음이 나다가도 왠지 섬뜩한 기분이 든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.


톰은 집을 떠난 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로라를 책임지는 윙필드 가의 가장이다. 영화를 좋아하는 톰은 시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지긋지긋한 물류공장에 다닌다.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어머니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아 집 안으로만 파고드는 누나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. 


아만다는 아침부터 톰에게 잔소리를 퍼붓고("일어나야지~") 과거의 자신 이야기만 늘어놓고("내가 젊었을 적엔 청년들이 줄을 섰었단다~") 영 마뜩찮은 톰을 닦달한다("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! 네가 아니면 우린 어떡하라고!") 로라는 그럴 때마다 늘 그렇듯, 이번에도 지나가리라,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. 톰은 가족이니까, 어머니니까, 참을 인 자를 새기며 꾹꾹 참다가도 가끔은 혈압이 올라 참을 수 없다. 그럴 때마다 톰이 찾는 것은 영화관. 그는 지치고 외로워 견딜 수 없으면 늘 스크린 속으로 도망간다. 물론, 아만다의 잔소리는 여지없이 따라온다("영화를 매일 보는 사람이 어디있니?!")


원하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붙어있는 직장, 사라진지도 모르는 새 잃어버린 꿈, 그런 꿈을 돌아볼 새도 없이 짐처럼 얹힌 책임, 그리고 늘 함께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, 그럼에도 가족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내 가족. 그러다 가끔, 참을 수 없을만큼 외롭고 삶이 버겁게 느껴져 어딘가로 피신하는 삶은 꼭 톰만의 것은 아니다. 1930년 대공황과 1997년, 2008년 금융위기 그리고 지금 우리의 현실 아래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은 꽤나 닮아있다. 중산층이 몰락한 고달픈 사회 속에서 가족이란 아픈 상처가 되기도,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기도, 떨쳐 버리고 싶은 부담이기도 하지만, '그럼에도' 가족이기 때문에 다시 돌아가는 곳이기도 하다. 


그래서 당신은 어쩌면, 잔소리꾼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엄마를 닮아 꽤 귀여운(정말 귀엽기도 하다!) 아만다의 한 마디에 울컥 서러워지고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톰의 뒷모습에서 누군가와 닮은 외로움을 발견하곤 마음이 아파질 수도 있다.

 


살기 위해 뿔을 꺾는 사람들

저 멀리 떠난 아버지처럼 훌쩍 떠나고 싶고 여전히 시를 쓰고 싶어하는 톰과 과거의 영광을 헤매는 아만다, 집 안에 틀어박혀 유리로 만든 동물들만 바라보는 로라. 윙필드 가의 사람들은 어딘가 현실 위에서 위태롭게 부유하는 듯하다. 하지만 그렇게 버텨가던 윙필드 가에도 파란은 찾아온다. 현실주의자 짐(심완준)이 그들의 세계를 방문한 것이다.


현실주의자, 그 현실이란 이름은 깨지기 쉬운 유리동물의 뿔을 꺾는다. 사라진지도 모르는 새 잃어버린 우리의 영혼처럼, 현실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 잘라버린 꿈처럼 유리동물은 깨져버린다.


그러나 윙필드 가에 현실처럼 찾아 온 짐 역시 꿈꾸는 자다. 아만다나 로라만큼, 톰만큼이나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다. 연극은 톰의 집과 물류공장 외의 다른 세상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견고한 바깥 세상을 전한다.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이루어질 수 없을 꿈만 꾸게 하는 세상이다. 그렇기에 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뿔을 꺾어낸다. 로라의 유리동물이 깨진 것처럼, 아만다의 추억이 빛 바랜 것처럼, 톰의 시가 버려진 박스에 쓰이고 버려지는 것처럼, 짐이 꿈을 꾸면서도 깨어있다고 믿는 것처럼. 


톰 역을 맡은 이승주 배우



기억한다는 것

짐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. 지워버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. 우리 중 대다수 역시 기억하기 힘든 것들은 지워버리는 것을 택하곤 한다. 현실이 깨버린 유리 조각들은 치우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. 톰 역시 등에 업은 무거운 책임과 때론 지긋지긋한 가족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했지만, 그는 기억했다. 끝내 기억해서 괴로워했지만 기억함으로써 존재했다. 


연극 <유리동물원>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기억에 대해 묻는다. 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? 세월이 지나면 우리는 영영 잊게 될까? 아니면 벌써 잊었는가?




참고: 연극 <유리동물원> 프로그램북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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